감정은 ‘기분’이 아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반응이다
감정(emotion)은 오랜 시간 철학과 심리학의 주제였지만, 현대 생명과학과 신경과학은 감정을 보다 구체적인 생물학적 반응 체계로 정의하고 있다. 즉, 감정은 단지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유전적, 신경적, 내분비적 요소들이 통합된 반응 시스템이다. 인간이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외부 자극 때문만이 아니라, 그 자극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처리하도록 유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뇌과학자들은 감정 반응을 일으키는 주요 뇌 구조로 편도체(amygdala),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 시상(thalamus), 시상하부(hypothalamus) 등을 꼽는다. 이 부위들은 감정 정보의 수용–분석–기억화–표현의 모든 단계에 관여하며, 이 과정은 유전자에 의해 구조적 전제와 반응 민감성이 결정된다. 예를 들어, 특정 유전자 변형은 세로토닌 재흡수 수용체의 민감도를 낮춰 우울 반응을 더 오래 지속시키고, 다른 유전자는 코르티솔(스트레스 호르몬) 분비에 대한 내성을 조절한다. 이처럼 감정은 유전자의 발현 구조와 뇌 내 신경 전달 체계의 복합 작용에서 발생한다.
유전자는 감정을 ‘결정’하지는 않지만, 감정이 ‘어떻게 표현되고, 얼마나 지속되며, 어떤 강도로 경험되는지’는 상당 부분 유전자에 의해 영향받는다. 이를 정서적 취약성(emotional vulnerability)이라 부르며, 이는 인간 개개인의 감정 반응이 어떻게 다르게 형성되는지를 설명해준다. 똑같은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화를 내고, 누군가는 울며, 누군가는 침묵하는 이유가 바로 이 유전-신경적 차이 때문이다. 이제 과학은 단순히 “감정이 생물학적 반응이다”라는 사실을 넘어서, ‘그 반응을 유전자 수준에서 조작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핵심에 CRISPR-Cas9 유전자 편집 기술이 있다.
뇌를 직접 만지는 기술이 감정을 고치는 기술이 될 수 있을까
2012년 이후 등장한 CRISPR-Cas9 유전자 편집 기술은 생명과학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이 기술은 세포 내 DNA 서열 중 특정 구간을 정밀하게 절단하거나 치환할 수 있는 분자 메커니즘을 제공한다. 간단히 말해, CRISPR는 유전자의 오타를 찾아내 고쳐 쓰는 생물학적 텍스트 편집기다. 기존의 유전자 조작 기술이 대규모 구조 변경에 초점을 맞췄다면, CRISPR는 정확한 위치에 정밀하게 개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뇌 관련 유전자 조작에도 가능성을 열었다.
뇌는 감정의 중심이자, 유전자의 표현이 가장 복잡하게 얽힌 기관이다. CRISPR를 통해 뇌 내 세로토닌,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등 주요 신경전달물질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발현을 변경하면, 그 영향은 단순한 생리 반응이 아니라 감정의 강도, 지속 시간, 회복력 등에까지 직접 미칠 수 있다. 실제로 미국 MIT, 스탠퍼드, 중국 저장대학 연구소 등은 CRISPR를 활용해 쥐의 불안 반응, 우울 반응, 쾌감 반응을 조절하는 실험을 진행해왔다.
예를 들어, 특정 유전자를 비활성화시킨 실험군 쥐는 스트레스를 가하는 실험 환경에서도 이례적으로 침착한 반응을 보였다. 이는 CRISPR가 편도체와 해마 간의 연결성을 바꾸거나, 시냅스의 민감도를 낮추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제시되었다. 다시 말해,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단순히 심리적 해석이 아닌, 유전자 조작에 의해 생물학적으로 감쇄될 수 있는 현상임이 입증된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조작은 아직 인간에게 적용되기엔 매우 조심스러운 단계에 있다. 뇌 유전자 편집은 예측 불가능한 부작용과 장기적 신경 손상 가능성, 나아가 인격과 정체성의 변형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CRISPR-Cas12, Cas13 같은 차세대 유전자가위 기술은 점점 더 정밀해지고 있으며, 뇌 특정 영역만을 타깃으로 편집하는 능력도 실험적으로 구현되고 있다. 즉, 과학기술은 감정이라는 인간 특성을 분해 가능한 생물학적 기전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점차 그것을 ‘개입 가능한 대상’으로 전환하고 있다.
감정은 이제 실험 가능한 생체 변수인가?
실제로 감정 조작을 목적으로 한 유전자 조작 실험은 2015년 이후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가장 활발한 분야는 우울증, 불안장애, PTSD와 같은 정서적 질환에 대한 치료 목적 연구였다. 이들 질환은 단순한 심리적 이상이 아니라 유전적 취약성과 신경계 반응 패턴의 변화가 동시에 작동하는 복합 질환이기 때문에, 유전자 기반 접근이 주목받았다.
예컨대 2016년 미국 UC 샌디에이고 연구진은 CRISPR 기술을 이용해 BDNF(Brain Derived Neurotrophic Factor) 유전자의 발현을 억제한 쥐에게서 강박적 불안 반응이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했다. 또 2019년 일본 교토대학에서는 MAO-A 유전자의 과발현을 억제함으로써 공격성을 현저히 낮춘 사례가 보고되었다. 이들 실험은 단순히 행동의 변화가 아니라, 정서적 기초 반응 자체를 재구성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더욱 조심스럽게 접근되고 있지만, 이미 유전자 기반 항우울제 개발, 정신질환 환자 대상 유전자 표적 치료, 신경 내분비 조절을 위한 유전자 삽입 임상시험 등이 제한적으로 진행 중이다. 2020년 프랑스 파스퇴르 연구소는 도파민 수용체의 유전적 민감도를 낮추는 편집 실험을 통해, 환자의 기분 장애 증세 완화를 일부 입증했다. 해당 연구는 CRISPR 기반이 아닌 RNA 간섭 기법을 사용했지만, 감정 조작이라는 관점에서는 동일한 접근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감정이 더 이상 ‘불가침의 심리영역’이 아님을 보여준다. 생명과학은 감정을 측정 가능한 생리 반응, 그리고 조절 가능한 생물학적 변수로 취급하고 있으며, 조작 가능한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는 동시에 인간 정체성에 대한 도전, 나아가 감정의 윤리적 본질에 대한 질문을 동반한다. 다음 문단에서는 감정 조작이 초래할 수 있는 자유의지 훼손, 자기결정권 침해, 인격 통제의 위험성을 윤리학 관점에서 조명한다.
기분이 나의 것이 아니라면, 나는 누구인가?
감정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경험이자 정체성의 핵심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무언가에 분노하거나, 슬픔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능력은 단지 신경 반응이 아니라 개인의 역사와 세계 해석이 응축된 자기 감각의 중심이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감정이 외부 개입(특히 유전자 수준의 개입)에 의해 바뀔 수 있다면, 그 감정은 여전히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유전자 편집을 통한 감정 조작은 단지 치료적 개입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곧 ‘이 감정은 느껴도 좋고, 이 감정은 제거해도 된다’는 종류의 선택권을 국가, 병원, 기술 기업, 또는 부모에게 부여할 수 있다. 이것은 정서적 통제권의 외부화이자, 자유의지의 축소다. 특히 아동이나 태아 단계에서의 감정 편집은 그 아이가 선택할 수 없는 상태에서 감정 구조를 설계해버리는 것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개인의 존재 조건을 사전 정의하는 조치가 된다.
게다가 감정은 윤리 판단의 핵심 요소다. 죄책감, 연민, 공감, 분노, 후회 같은 감정이 없다면, 도덕은 실현될 수 없다. 만약 어떤 유전형이 특정 집단에서 불필요한 분노를 유발한다고 판단되어 그 유전자가 제거된다면, 그 결과는 단지 사회적 평화가 아니라 윤리적 마비와 도덕적 무관심의 확산이 될 수도 있다. 즉, 감정 조작은 도덕감각 자체를 설계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위험한 전제를 포함한다.
정치적 악용 가능성도 있다. 만약 특정한 국가가 ‘공포를 잘 느끼지 않는 군인’이나 ‘항의하지 않는 시민’을 만들고자 유전자 조작을 시행한다면, 그 기술은 곧 전체주의적 통제 장치가 된다. 감정은 항거의 시작이자, 해방의 출발점이며, 인간의 권리를 스스로 요구하게 만드는 내적 원천이다. 따라서 감정의 인위적 조작은 정치적 반응 능력을 제거하는 기제로도 악용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감정이 유전자로 설계 가능하다면, 인간은 여전히 자유로운 존재인가?”
기술은 어디까지 도와야 하고, 어디서 멈춰야 하는가
감정을 유전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는 흥미롭지만, 철학적으로는 섬뜩한 명제다. 그 이유는 감정이 인간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이성뿐 아니라 감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랑, 후회, 분노, 기대, 불안과 같은 감정은 단지 반응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형성하는 심리적 지도다. 이 지도를 바꾼다는 것은 곧 인간의 미래를 재설계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감정을 설계할 수 있는가? 기술적으로는 점점 가능해지고 있다. 그러나 가능하다는 것이 곧 실행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생명과학은 지금까지 수많은 질병을 정복하고 고통을 줄여왔다. 그러나 감정은 질병이 아니다. 감정은 때로 고통스럽고 비합리적이지만, 그 불완전성 속에서 인간은 공감하고 연결되고 성장한다. 기술은 감정을 ‘고쳐야 할 오류’로 보게 만들지만, 감정은 ‘인간다움의 흔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안해야 한다.
- 치료 목적 이외의 감정 편집은 제한되어야 한다.
우울증·PTSD 등 질병 수준의 감정 이상에만 적용하고, 감정 선호도에 따른 사전 편집은 금지해야 한다. - 편집된 감정 구조는 반드시 사용자의 후천적 동의가 가능할 때만 시행되어야 한다.
특히 아동이나 배아 상태에서의 조작은 금지되어야 한다. - 정서 다양성의 사회적 가치 인정을 법제화해야 한다.
특정 감정 반응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생물학적으로 제거하는 경향을 막기 위한 사회적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
우리는 감정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감정을 왜 바꾸려 하는지, 누가 그 결정을 내리는지, 그리고 그 감정이 사라졌을 때 인간은 어떤 존재가 되는지를 반드시 함께 물어야 한다. 감정은 우리가 인간으로 남아있기 위한 마지막 경계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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